문명의 중심국가, 중국
문화란 참으로 신기하다.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역류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특히 고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일본은 지금도「극동」이라고 불린다. 파 이스트, 즉 문명의 중심인 유럽, 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 그것도「중동」,「근동」보다 더 떨어져있다는 의미이다. 일본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말은 좀 열받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 있어 이는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문명의 중심은「중화의 나라」즉,「중국」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은 원래 지명이 아니다. 문명의 중심인 국가라는 의미로,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근방의 나라들은, 이 초대국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수학, 철학, 문학, 혹은 의학, 음악 등 오늘날 우리들이「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것이 중국을 발상의 땅으로 한다. 실제로 지금 나는 원고를 쓰기 위해「한자」라고 하는, 중국문자를 쓰고 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중국문화가 가진 영향성의 대단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에 있어 일본과 중국의 문명 차이는,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차이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뭐든지 중국류에 물들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교사 중국과 아이인 일본의 사이에 서있던 것이 조선이다. 조선반도는 중국대륙과 직접 땅으로 이어져 있다. 때문에 그들은 떨어진 작은 섬나라에 사는 일본인들보다 훨씬 더 일찍 중국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중국문화는 조선반도가 먼저 맛을 보고, 일본에 전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문화를 용이하게 흡수할 수 있었다.
일본의 독자적인 「민족 고전」
중국문화의 이해도에 있어, 우리 일본인은 항상 조선민족에게 뒤쳐져왔다. 이것은 사실이다. 지리의 이점이 작용한 것이다. 중국문화가 전성기에 달했을 때도, 항상 조선이 중국의 첫번째 제자였다. 일본은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두번째 제자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실로 짖꿏게도,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조선에 독자적인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중국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아,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는 잠시 한켠으로 제쳐져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문학」이다. 일본은 고대의 국가 건설기부터의 가요, 서사시 등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실로 신기한 나라이다. 이는 민족의 뛰어난 문화유산이고, 남아있는 것이 당연한게 아니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대에 있어 「얼마나 중국화 하는가」,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얼마나 중국문화를 잘 카피하는가」가「문화」라는 것의 척도였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유럽에서는「얼마나 로마화(그리스화) 하는가」가 가장 중대한 요소였고, 혹은 그 이전에는 「이집트화」가 문화의 척도였다. 결국, 어떠한 학문을 하든, 선진문명국의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 초기가 그러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하지 못하면, 교과서조차 읽을 수 없는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문학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문학도 선진문명국의 양식으로, 그 언어를 사용해 이야기 되는 것이었다. 중국문화에 있어 최고의 문학은 시(한시)이며, 한시를 읊는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이는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예를 들면, 재즈라는 것이 처음 일본에 유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스타일(양식)을 일본식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재즈를 그대로, 영어인채로 노래 부르며, 연주했다. 일본어로 번역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문화라는 것은, 먼저 있는 그대로를 수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지식인과 관료들이 문학을 한다면 한시를 읽으면 된다, 읽어야 한다 라는 태도를, 천년 이상에 걸쳐 취했다. 당연히 자국의 노래, 시, 소설 등은 무시 혹은 경시되게 된다. 이는 고대에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에서, 한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라틴어이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공용어이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유럽에서는 시나 학문의 논문 등을 라틴어로 적는 것이 정식이 되었다. 성서도 라틴어로 쓰여졌다. 각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종교를 민중의 손에」라고 외쳤던 종교개혁의 운동이 일어난 이후이다. 때문에 그 나라 독자의 언어를 사용한「민족의 고전」이라는 것은 한국처럼 경시되거나, 잊혀지는 것이 대개의 경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먼 옛날부터의 민족 고전 등이 다수 보존되어 온 것은, 이런 세계의 문화 상식과 반대되는 일로 실로 기묘한 현상이다.
일본인이 가나를 만든 이유는…
어째서『만요슈』『고킨와카슈』『타케토리모노가타리』가 남아있고, 후에 근대적인 소설로서 세계최초라고도 할 수 있는『겐지모노가타리』에 발전하게 되었을까. 이는 일본어를 자유롭게 기록해 나타낼 수 있는, 가나(かな)라고 하는 문자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옆나라인 한국이 민족고유의 문자, 한글을 만들어 낸 것은 무려 15세기가 되서부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글이 만들어 진 것에 대해, 당시 지식계급은 맹렬히 반발했다.「그런 일을 하면, 중국문화의 소화가 소홀해진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생각 속에서는『만요슈』도,『타케토리모노가타리』도 결코 태어날 수 없다. 한국이 한글로 독자의 민족문화를 쌓아올리는데는, 좀 더 세월이 걸린다. 심지어, 지식계급은 일관해서 그러한 한글문화에 차가운 태도를 취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인은 가나를 만들었던 것일까. 이는 아마도 말이 가진 일종의 주력(呪力)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코토다마(言霊,언령)이다. 말의 주력이라는 것은 다른 언어로 번역해버리면 사라지게 된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진언밀교에서 사용하는「진언(真言)」이다. 이는 일종의 주문(呪文)인데, 고대 산스크리트어(범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에, 번역하려고 하면 충분히 번역할 수 있음에도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조선반도는 일본보다 빨리 문화의 꽃을 피웠다.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말의 주력」같은 미신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러한 미신이 남아서, 남았기 때문에 완전히 중국화하지 않고,「일본어의 노래」를 보존하고자 하여, 가나를 만들었던게 아닐까. 가나는 누가 만들었는지 불명이지만, 분명 상당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다.「이로하사십칠문자」의 노래를 만든 것은 쿠카이(空海)라는 가설도 있는데, 쿠카이야말로 진언밀교의 개조였기에,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가설이다.
가나가 완전한 중국화를 저지했다
그렇다면, 가나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중국문화의 강대한 영향력에 대항하지 못했을거란 것이다. 가나는 그 거대한 영향력에 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 가나가 없었다면,『만요슈』도,『고킨슈』도,『겐지모노가타리』도 없었을 것이다. 국풍문화도 없다.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법이기도 한 율령에 대비되는, 가나로 쓰여진「시키모쿠(式目)」도 없다. 그렇게 되면 사무라이도 없어진다.
사무라이라는 것은, 율령 속에는 없는 체제의 「별난 아이」이다. 하지만 사무라이가 훗날 천하를 쥐고,「막부」라는 이름의 단어는 중국풍이지만 중국에는 없는 일본독자의 정부를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이 막부의 법이 시키모쿠이다. 중국화의 큰 흐름 속에서라면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중국 문화는 대개「문(文)」을 숭상하고,「무(武)」를 경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유교화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도시대, 유교가 유행했을 때, 일본의 지식인은, 예를 들자면 칸 사잔(菅茶山)이나 루이 산요(頼山陽)와 같은 사람처럼, 중국풍으로 성명을 짓는 좋아했다. 만약 일본에 가나가 없고, 중국화가 좀 더 빨리 진행되었다면, 일본인 전체는 중국식의 한글자 성을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이 그러하다. 한국어와 중국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식의 한글자 성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화가 진행되었으면, 일본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가나가 없었다면 같은 중국문화의 제자로서, 한국과 일본의 사이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우호적이게 되었을 것이다.
문화란 참으로 신기하다.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역류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특히 고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일본은 지금도「극동」이라고 불린다. 파 이스트, 즉 문명의 중심인 유럽, 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 그것도「중동」,「근동」보다 더 떨어져있다는 의미이다. 일본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말은 좀 열받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 있어 이는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문명의 중심은「중화의 나라」즉,「중국」이었다. 중국이라는 말은 원래 지명이 아니다. 문명의 중심인 국가라는 의미로,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근방의 나라들은, 이 초대국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수학, 철학, 문학, 혹은 의학, 음악 등 오늘날 우리들이「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것이 중국을 발상의 땅으로 한다. 실제로 지금 나는 원고를 쓰기 위해「한자」라고 하는, 중국문자를 쓰고 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중국문화가 가진 영향성의 대단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에 있어 일본과 중국의 문명 차이는,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차이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뭐든지 중국류에 물들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위대한 교사 중국과 아이인 일본의 사이에 서있던 것이 조선이다. 조선반도는 중국대륙과 직접 땅으로 이어져 있다. 때문에 그들은 떨어진 작은 섬나라에 사는 일본인들보다 훨씬 더 일찍 중국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중국문화는 조선반도가 먼저 맛을 보고, 일본에 전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문화를 용이하게 흡수할 수 있었다.
일본의 독자적인 「민족 고전」
중국문화의 이해도에 있어, 우리 일본인은 항상 조선민족에게 뒤쳐져왔다. 이것은 사실이다. 지리의 이점이 작용한 것이다. 중국문화가 전성기에 달했을 때도, 항상 조선이 중국의 첫번째 제자였다. 일본은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두번째 제자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실로 짖꿏게도,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조선에 독자적인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중국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아,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는 잠시 한켠으로 제쳐져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문학」이다. 일본은 고대의 국가 건설기부터의 가요, 서사시 등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실로 신기한 나라이다. 이는 민족의 뛰어난 문화유산이고, 남아있는 것이 당연한게 아니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대에 있어 「얼마나 중국화 하는가」,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얼마나 중국문화를 잘 카피하는가」가「문화」라는 것의 척도였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유럽에서는「얼마나 로마화(그리스화) 하는가」가 가장 중대한 요소였고, 혹은 그 이전에는 「이집트화」가 문화의 척도였다. 결국, 어떠한 학문을 하든, 선진문명국의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 초기가 그러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하지 못하면, 교과서조차 읽을 수 없는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문학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문학도 선진문명국의 양식으로, 그 언어를 사용해 이야기 되는 것이었다. 중국문화에 있어 최고의 문학은 시(한시)이며, 한시를 읊는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이는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예를 들면, 재즈라는 것이 처음 일본에 유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스타일(양식)을 일본식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재즈를 그대로, 영어인채로 노래 부르며, 연주했다. 일본어로 번역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문화라는 것은, 먼저 있는 그대로를 수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지식인과 관료들이 문학을 한다면 한시를 읽으면 된다, 읽어야 한다 라는 태도를, 천년 이상에 걸쳐 취했다. 당연히 자국의 노래, 시, 소설 등은 무시 혹은 경시되게 된다. 이는 고대에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에서, 한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라틴어이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공용어이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유럽에서는 시나 학문의 논문 등을 라틴어로 적는 것이 정식이 되었다. 성서도 라틴어로 쓰여졌다. 각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종교를 민중의 손에」라고 외쳤던 종교개혁의 운동이 일어난 이후이다. 때문에 그 나라 독자의 언어를 사용한「민족의 고전」이라는 것은 한국처럼 경시되거나, 잊혀지는 것이 대개의 경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먼 옛날부터의 민족 고전 등이 다수 보존되어 온 것은, 이런 세계의 문화 상식과 반대되는 일로 실로 기묘한 현상이다.
일본인이 가나를 만든 이유는…
어째서『만요슈』『고킨와카슈』『타케토리모노가타리』가 남아있고, 후에 근대적인 소설로서 세계최초라고도 할 수 있는『겐지모노가타리』에 발전하게 되었을까. 이는 일본어를 자유롭게 기록해 나타낼 수 있는, 가나(かな)라고 하는 문자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옆나라인 한국이 민족고유의 문자, 한글을 만들어 낸 것은 무려 15세기가 되서부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글이 만들어 진 것에 대해, 당시 지식계급은 맹렬히 반발했다.「그런 일을 하면, 중국문화의 소화가 소홀해진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생각 속에서는『만요슈』도,『타케토리모노가타리』도 결코 태어날 수 없다. 한국이 한글로 독자의 민족문화를 쌓아올리는데는, 좀 더 세월이 걸린다. 심지어, 지식계급은 일관해서 그러한 한글문화에 차가운 태도를 취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인은 가나를 만들었던 것일까. 이는 아마도 말이 가진 일종의 주력(呪力)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코토다마(言霊,언령)이다. 말의 주력이라는 것은 다른 언어로 번역해버리면 사라지게 된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진언밀교에서 사용하는「진언(真言)」이다. 이는 일종의 주문(呪文)인데, 고대 산스크리트어(범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에, 번역하려고 하면 충분히 번역할 수 있음에도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조선반도는 일본보다 빨리 문화의 꽃을 피웠다.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말의 주력」같은 미신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러한 미신이 남아서, 남았기 때문에 완전히 중국화하지 않고,「일본어의 노래」를 보존하고자 하여, 가나를 만들었던게 아닐까. 가나는 누가 만들었는지 불명이지만, 분명 상당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다.「이로하사십칠문자」의 노래를 만든 것은 쿠카이(空海)라는 가설도 있는데, 쿠카이야말로 진언밀교의 개조였기에,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가설이다.
가나가 완전한 중국화를 저지했다
그렇다면, 가나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은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중국문화의 강대한 영향력에 대항하지 못했을거란 것이다. 가나는 그 거대한 영향력에 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 가나가 없었다면,『만요슈』도,『고킨슈』도,『겐지모노가타리』도 없었을 것이다. 국풍문화도 없다.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법이기도 한 율령에 대비되는, 가나로 쓰여진「시키모쿠(式目)」도 없다. 그렇게 되면 사무라이도 없어진다.
사무라이라는 것은, 율령 속에는 없는 체제의 「별난 아이」이다. 하지만 사무라이가 훗날 천하를 쥐고,「막부」라는 이름의 단어는 중국풍이지만 중국에는 없는 일본독자의 정부를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이 막부의 법이 시키모쿠이다. 중국화의 큰 흐름 속에서라면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중국 문화는 대개「문(文)」을 숭상하고,「무(武)」를 경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유교화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도시대, 유교가 유행했을 때, 일본의 지식인은, 예를 들자면 칸 사잔(菅茶山)이나 루이 산요(頼山陽)와 같은 사람처럼, 중국풍으로 성명을 짓는 좋아했다. 만약 일본에 가나가 없고, 중국화가 좀 더 빨리 진행되었다면, 일본인 전체는 중국식의 한글자 성을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이 그러하다. 한국어와 중국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식의 한글자 성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화가 진행되었으면, 일본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가나가 없었다면 같은 중국문화의 제자로서, 한국과 일본의 사이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우호적이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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