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 유품 최초공개

 









영화화, 무대화로 다시 미시마 유키오 붐이 도래!! 헌법개정을 외쳤던 남자의 신념.



FLASH 2017-06-13
방패회 회원에게 보냈던 유품을 첫 공개.










"지금, 미시마 유키오가 조용히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라며 도내 대형서점원이 미시마 작품의 판매량 호조를 전했다. 장편소설 목숨을 팝니다가 매상 26만부를 돌파하며 롱셀러가 됐고, 항상 문고본 랭킹 상위에 랭크인하고 있다. 또한 3월부터 미와 아키히로가 미시마 작품을 무대에서 연기, 5월 26일에는 sf소설 아름다운 별의 실사판 영화가 개봉되었다.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







그야말로 다시 붐이 오고있는 미시마는 생전 애용했던 많은 물품과 서적을 유품으로서 방패회(楯の会) 회원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번에 그 전직 회원들이 미시마의 귀중한 유품을 처음으로 공개해줬다. 미시마와 함께 할복자살한 방패의 모임 학생장이었던 모리타 마사카츠씨 생가의 불단에는 미시마의 직필로 武라고 적혀있는 족자와 미시마의 애도가 보관되어있다.





1기생이었던 시노하라 유타카(篠原裕)씨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선 일관불혹(一貫不惑, 한가지 일을 관철하며 망설이지 않는다)이란 말을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색지에도 써주셨습니다. 아마도 이런 신념이 그 결기사건을 유발한 것이겠죠. 선생님께서는 문학작품도 행동도, 그리고 목숨까지도 궐기사건에서 완결되도록 용의주도하게 준비하신것 같습니다."






마지막 회원이었던 후쿠다 토시오(福田敏夫)씨가 말을 이었다.
"지참했던 2장의 색지에 제가 고른 말을 그 자리에서 써주셨습니다. 장소는 유라쿠쵸에 가까운 월광장이란 화랑. 일본도는 방패의 모임 해산식후, 미시마 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자택에서 받은 것입니다."





충격의 할복자결로부터 47년. 만약 미시마가 살아있었다면 만92세가 된다.



"그날 선생님은 헌법개정과 자위대의 국군화를 주장하셨지만 다들 코웃음 칠뿐, 제대로 듣는자는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회에서 헌법문제가 왕성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반세기 전 선생님께서 말한 것이 현실이 됐습니다. 드디어 시대가 미시마 정신을 따라잡은 것 같네요. 이러한 기운도 미시마 붐의 요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시노하라씨)













방패회(楯の会)




1기생 시노하라 유타카(68세)
와세다 대학 재학중 미시마와 만나 제자로 들어갔다. 1968년 방패의 모임 1기생으로서 입회. 자결20일전, 최후의 이별이 된 술자리에 참가. 당시 미시마는 대원 50명 앞에 정좌하고, 한명한명에게 술을 따르며 고생했다는 말을 한후, 애창가 당사자모란(唐獅子牡丹)을 열창했다고 한다. 목도와 가라테 연습복은 미시마로 부터 받은 자금으로 구입. 목도는 전원에게 배포되었다. 미시마는 체육관에 다니며 육체단련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1기생 故 모리타 마사카츠(향년 25세)
1967년 와세다 대학에 방위문제를 연구하는 국방부를 만든 모리타 마사카츠. 1969년 방패의 모임에 들어간지 불과 2개월후, 모리타와 9명의 대원은 미시마로부터 일본도를 받는다. 생가의 불단에는 모리타와 미시마의 영정사진이 나란히 놓여있다. 일본도의 칼날은 약70cm. 칼집은 갈색. 미시마는 일본도에 강한 애정을 품었다. 모리타는 카이샤쿠할때 명도 세키노 마고로쿠(関の孫六)를 사용했다.





5기생 후쿠다 토시오(68세)
1970년 방패의 모임에 입회. 미시마는 사후 방패의 모임 해산을 원했고, 1971년에 해산한다. 그후 미시마 부인으로부터 유품으로 미시마가 애용했다고 하는 줄무늬 넥타이와 칼날 약98cm의 일본도를 받았다. 칼집에는 국화문장이 새겨져있다. 사건당시 이치가야 회관의 열회에 출석한건 正副반장이 아니라 미시마가 직접 지명한 회원들이었다. 8반 부반장이었던 후쿠다씨는 지명받지 못했고, 세타가야의 아파트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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