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족 회고담 6화. 신세대 게이잡지의 가치관

 









이토 분가쿠




일본최초의 상업게이잡지 장미족이 일정 성공을 거둔후, 1970년대 후반~90년대에 걸쳐 다양한 게이잡지들이 탄생하고, 사라져갔다. 그와중에도 장미족은 원조로서 영향력을 잃지않고, 게이잡지 넘버원의 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런 구도도, 결국 붕괴된다. 93년 신잡지 Badi의 등장으로 무너지지 않을것만 같았던 게이잡지계의 히에라르키가 뒤집어진다.




Badi를 창간한 히라이 타카시(平井孝)씨. 그는 신주쿠 2쵸메에서 게이샵 루미에르를 경영했다. 물론 장미족도 루미에르에 놓여있었다. 많을때는 월2000부였다고. 히라이씨를 중심으로, 성인비디오 제작사, 게이샵 13개사가 모여 창간한 Badi는 90년대 답게 파워가 넘치는 잡지였다. 젊은 세대를 타켓으로 전국각지의 특집기사, 게이 컨텐츠의 트렌드 정보 등 알맹이가 보다 일반문화지에 가까웠다. 창간시의 캐치프레이즈는 "강한 남자의 하이퍼 매거진". 이 카피는 1997년 "우리들의 해피 게이 라이프"로 변경된다.





Badi는 장미족을 노골적으로 라이벌시했다. Badi가 창간된후 "루미에르"에선 장미족이 쫓겨났다. 실제로 Badi 창간시 편집장 대행을 맡았던 마가렛씨는 "장미족의 매상을 뛰어넘는다"를 목표중 하나로 삼았다. 마가렛씨는 처음으로 장미족을 집어들었을때의 감상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장미족은 호모인걸 숨기고, 세상사람의 눈에 맞춰 결혼해라. 그리고 밤에 게이바에서 놀면 되지 않는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걸 읽었을때 절망감 밖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게 죄인가?"(게이의 역사는 중요하다. 북카페 오카마루트의 도전/하프포스트)





장미족을 읽고 구원받은 사람도 많은 반면, 이렇게 느낀 젊은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Badi를 보다 개방적이고 밝은 잡지로 만들기로 했다. 젊은 편집자를 많이 기용하고, 잡지내에서 적극적으로 얼굴을 노출시켰다. 이중에는 훗날 여장퍼포머가 된 브루봉느, 탤런트 마츠코 디럭스 등이 유명하다. 이렇게 Badi의 색깔은 젊은세대를 중심으로 강한 지지를 얻었다. 한편 여전히 폐쇄적인 팬커뮤니티를 소중하게 여긴 장미족은 점점 매상이 줄어들었고, 99년에 게이잡지 넘버원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 넘버원 교대극은 "폐쇄에서 개방으로"라는 사회전체의 움직임이 여실히 반영돼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장미족 창간시의 이토, 후지타 류, 마미야 히로시 등의 편집스탭들도 마가렛씨와 같은 발언을 했다. "누가 읽어도 칙칙한 기분이 들지않는, 밝고 깨끗한 잡지를 만들자" 이것이 자신도 게이였던 후지타씨의 모토였다. 1977년 이토는 장미족 칼럼에 이렇게 썼다. "탈옥수, 범죄자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숨죽이고 살아야하나". "독자를 격려하고, 인생에 희망을 줄 수있는 잡지를 만들자"라는 마음. "해피 게이 라이프"에의 바람은 장미족, Badi 모두에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뀐 것이다. 해피에 대한, 게이에 대한, 라이프에 대한 가치관이.





인터뷰 과정에서 이토씨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게이들은 옛날 게이보다 행복한가?" 행복한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결혼에 대한 압력은 70년대보다 훨씬 낮아졌다. 라고 답하자 이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남자든, 여자든 독신이 많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정말로 그건 좋아졌다." 수많은 가치관이 시대에 따라 변해간다. 이에 맞춰 태어나는 미디어도 있고, 역할을 마치는 미디어도 있다. 한때 장미족에게서 게이잡지의 왕좌를 빼앗았던 Badi도 2019년 3월호로 휴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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