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분가쿠
게이잡지 장미족의 독자중엔 소수파지만 여성도 있다. 장미족 창간이전, 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단행본 레이블 "나이트북스"를 전개하던 시절부터 이토씨를 찾아온 여성독자는 꽤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성상담을 위해 이토를 찾았다. 그중에는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 즉 레즈비언도 많았다. "결혼한 주부도 있었고, 여배우도 있었습니다. 남자에 비하면 찾아온 사람은 적었지만, 레즈비언 인구도 상당하다는걸 그때 알았습니다." 이후 장미족을 창간하자 여성독자의 반응도 꽤 있었다.
장미족에 대한 여성독자의 반응은 크게 3패턴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번째는 남편 혹은 아들같은 가까운 친족이 실은 게이였다, 혹은 그 가능성이 높아 난처한 여성의 상담. 예를 들면 1993년 5월호의 이토씨 칼럼에 그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아들의 동성애에 대해 죄악감을 품고 있으며, 부친은 무관심해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하는 모친의 고민.
두번째는 레즈비언 독자. 장미족 편집부에는 종종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의 편지가 왔었다. 1981년 9월호에 게재된 "나는 이성을 사랑할 수 없는 여자"라는 편지. "나는 4개월전에 우연히 장미족을 접하고, 그후 매호 애독하게 된 여성독자입니다.(중략) 저와 같은 고민이 장미족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고뇌가 안전하게 공개된 장미족은 비록 성별은 다르지만 레즈비언도 공감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당시 일본엔 레즈비언 상업지가 없었다. 1976년, 미니코미 잡지로서 "멋진 여성들"이란게 레즈비언 잡지의 선구자로 간행됐지만, 1호만에 폐간되었다. 이토씨는 그녀들의 투고를 존중해 한때는 지내에 "백합족의 방"이란 레즈비언 코너를 만들었다. 백합족이란 이토씨가 만든 조어이다. 이후 백합이란 단어는 픽션분야에서 레즈비언물의 속칭이 되었다. 이것이 "백합"이란 말의 어원이다. 하지만 어째서 게이잡지에서 레즈비언을 다뤘나? "나는 게이보다 레즈비언이 더 힘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응원하고 싶었죠. 하지만 어려웠습니다. 게이들이 여성이야기를 다루는걸 싫어했습니다. 특히 편집부 멤버들이 여성을 싫어해, 백합코너는 금방 문을 닫았습니다." 이토씨 입장에선 게이, 레즈비언 모두 동성애로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장미족 스탭, 다수의 독자는 장미족을 게이남성만의 공간으로 유지하고 싶어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장미족에 게재된 의견, 체험담에 이의를 제기하는 여성들. 이토씨는 "결혼특집이 특히 반응이 뜨거웠다"라고 말했다. 70~80년대 장미족에선 결혼이 중대한 테마였다. "어떻게 하면 게이라는걸 들키지 않고, 결혼할 수 있을까?" "아내 몰래 게이의 성생활을 즐기고 싶다." 등이 당시 독자들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성독자들은 "남편으로서 불성실하다"라며 반론을 표했다. 이토는 그녀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면에 실으면서, 독자간의 대화를 촉진시켰다. 이건 당시 이토씨가 동성애자의 결혼에 대한 답을 찾지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훗날 이런 식의 위장결혼은 게이남성들도 크게 비판하게 된다. "나도 지금은 게이라는걸 숨기고 결혼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엔 결혼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시대였다." 방금전 소개한 투고문 "나는 이성을 사랑할수 없는 여자"을 게재하기에 앞서 편집부는 이런 문장을 실었다. "결혼이란 악마를 행복으로 바꾼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여기서 악마란 결혼을 말하는게 아니다. "남녀가 맺어지는 것만이 옳다"라는 규범을 지적한 것이다. 이 규범 때문에 괴로워한 사람은 결코 게이남성만 있는게 아니었다. 장미족에 기록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아닐까.
토막상식
현재 레즈비언물을 가리키는 "백합"이란 단어.
게이잡지 장미족의 편집장 이토 분가쿠가 만든 말이다.
장미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쓴 백합족이 그 어원.
다수의 게이들이 여자 싫어해서 레즈비언 코너(백합족의 방)는 금방 퇴출됨ㅋㅋㅋㅋㅋ 성소수자끼리 배척하는 웃긴상황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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